작품소개
- 고대의 약속은 다시금 그 모습을 나타내고, 사랑은 인연을 찾아 떠돈다….
이스타니아 왕국을 다스리는 라자, 라지드. 그는 단단한 외모 못지않은 강인한 자긍심의 소유자였으나 그 속에는 얇고도 치명적인 상처가 새겨져 있었다. 다시는 여인을 신뢰하지 못하게 만든 치명적인 상처는 에레미아를 다시 만났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작용하고 말았다. 얼마 전 자신이 구해 준 여인으로 마주했을 때의 아름다운 신비스러움은 그녀가 자신에게 바쳐진 선물이라는 것에 대한 실망감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울 하룸’, 아름다운 선율을 노래하는 악사. 그리고 오래된 약속의 증표를 가진 여인이었다….
▶잠깐 맛보기
“궁중의 악사로 들어왔다는 말인가?”
“축제가 끝나는 보름까지는 라자의 악사이옵니다.”
“릴라 차벨라라고 했던가? 그럼 지금 이 만남은 신의 뜻이겠군.”
에레미아는 손에 쥔 하프의 현을 한 번 훑었다. 울리는 맑은 현 소리.
“지나가는 인사말에 굳이 의미를 둘 필요가 있을는지요? 만날 인연이니 만나는 것일 뿐.”
“다시 만날 때 무엇으로 보답할지 말해 주겠다고 했었지.”
“네, 라자. 그리 말씀하셨지요.”
조곤조곤한 음성으로 따박따박 대꾸하는 그녀를 보고 라지드는 입술 끝을 옆으로 늘였다. 속 좁은 이가 보았다면 건방지다 여겼겠지만 그의 눈에는 굽힘 없는 당당함으로 다가와, 항상 비굴하게 아첨하는 자들만 대하느라 답답하던 속에 청량제처럼 상쾌함을 뿌렸다.
“두렵지 않느냐? 널 구해 준 대가로 내가 무엇을 달라 할지…….”
에레미아의 눈동자가 놀란 듯 커다랗게 열리자, 라지드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금방이라도 툭 떨어질 듯한 청은석 두 알이 귀여웠다. 에레미아는 놀림보다 웃음으로 부드럽게 풀린 사내의 얼굴이 더 당혹스러웠다. 이보다 짓궂고 낯 뜨거운 장난질도 당해 보았거늘, 어찌해 저 웃음 하나에 이리 당황하는 것인가.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도 알 수 없어 아랫입술만 보이지 않게 깨물었다.
“제국의 주인이신 라자께서 원하실 만한 것이, 과연 제게 있을지 의문입니다. 하오나 약속은 약속. 바라시는 것이 있다면 내어드려야지요. 그것이…… 제게 있다면 말입니다.”
어지러운 생각들을 더는 깊이 파고들지 않고 강제로 한쪽에 밀쳐둔 채 에레미아는 말간 눈빛을 들었다.
“글쎄, 네 말대로 지금 당장은 네게 원하는 것이 따로 없는 것 같군. 한동안은 네 하프 연주를 계속 들을 수 있을 테니, 시간은 넉넉하고……. 그동안 생각해 보도록 하지. 네게서 무엇을 받아 낼 수 있을지 말이야.”
장난기를 섞어 가볍게 던진 말이기는 했지만, 라자인 그가 내뱉은 말이었다. 명령이나 협박으로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 말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는 여자라……. 재미있군. 그래, 처음 봤을 때도 그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