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소개
* 키워드 : 집착남, 후회남, 카리스마남, 능력녀, 상처녀, 이야기중심, 무심남, 존댓말남, 재벌녀, 계략녀, 철벽녀, 냉정녀, 무심녀, 도도녀
오만함이 내뱉는 숨결같이 당연한 남자.
귀족 중의 귀족. 사랑을 위해 주변을 모조리 불살라 버린 남자.
그게 바로 내 남편, 커티스였다.
나는 ‘한 여자’인 이르벨린이 커티스의 사랑이 되는 순간
그의 손에 죽어 없어질 아내였을 뿐.
남편의 손에 죽어 회귀한 나는 살기 위해 연기를 시작했다.
앞으로 1년 후, 나를 죽일 남편에게서 벗어날 일생일대의 연기를.
*
“달리아. 시간을…… 당신과 나 사이의 시간을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아무것도 아니면요?”
되묻는 달리아의 목소리와 표정이 너무나도 잔잔하고 한편으로는 성의 없어 보였기에 커티스는 말문이 막혔다.
평생 누구 앞에서도 타의로 입을 닫은 적이 없는 그의 혀가 처음으로 굳어졌다.
그리고 커티스의 곁에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말해 본 적 없는 달리아의 창백한 입술은 종달새처럼 속닥거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공작님. 그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누군가와의 관계는 함께 보낸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첫눈에 서로에게 반하기도 하고, 몇십 년 동안 곁에 있어도 그저 데면데면한 사이로 남기도 하는 것처럼.
“켜켜이 쌓여 돌아볼 시간 같은 거.”
달리아는 나붓이 미소하며 커티스와 애초부터 없었던 관계의 종언을 고했다.
“없잖아요. 우리.”
▶잠깐 맛보기
유난히 크고, 금방이라도 울 듯이 붉은 달이 뜬 밤.
달리아가 회귀한 그 밤은 뼈가 시리도록 추웠다.
“으, 허억! 허억허억허억.”
넘어갈 것처럼 숨을 들이켜며 튕기듯 몸을 일으킨 달리아는 깨어나기 직전, 무자비한 검에 갈린 제 가슴을 부여잡았다.
“커헉, 커, 커헉.”
징그러울 만큼 부드러운 이불에 고개를 박고 침인지 숨인지 혹은 피인지 모를 것을 토해 내던 달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체 같은 잿빛 안색과 죽은 생선의 눈알과 같이 표백된 눈동자.
한때 발그레한 뺨과 신록의 색으로 반짝이던 눈은 빛이 바랜 지 오래였다.
깜박, 다시 깜박.
눈을 두어 번 깜박인 달리아는 느릿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
한탄처럼 나온 가느다란 목소리였건만, 제풀에 놀란 달리아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이런 목소리라도 제대로 입 밖에 내 본 것이 언제였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