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소개
사는 동안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
목숨을 구해 준 이라든가
생명을 불어넣어 주느라 첫 입맞춤을 내어 주는 여자라든가.
그래서였을까.
한눈에 알아봐졌고 사랑이 시작되었다.
송태은은 신기하게도 한눈에 알아봐졌다.
“정우재 씨?”
야리야리한 생김새와 달리 꽤 건조한 목소리다.
“송태은입니다.”
알지, 송태은.
우재는 속으로 이름을 곱씹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요즘도 가끔 그때의 꿈을 꾸었으니까.
“나 어디서 본 적 없어요?”
“네. 본 적 없어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들려오는 대답에 우재의 입꼬리가 슬쩍 들렸다.
“그럴……. 뭐, 내가 착각한 거로 치죠.”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해 주려다 문득 얼마 만에 태은이 자신을 기억해 낼지가 궁금해졌다. 기억해 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까. 놀랄까.
눈앞에 앉은 현재의 송태은에게 관심이 쏠리고 있었다.
미리보기
“궁금한 게 있는데 ‘은하우스’는 태은이네 집이라는 뜻인가?”
태은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멈칫했다. 그러더니 손을 느리게 놀리며 대답했다.
“그 여자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래?”
“…….”
“그럼 내기 하나 할까?”
이길 확률 100%의 내기를 제안하는 우재의 목소리가 은밀해졌다.
“송태은이 그 여자와 동일 인물이라는 데 밥 다섯 번.”
“왜 그렇게 밥에 집착해요?”
“그럼 데이트 다섯 번이라고 할까?”
“하아, 그리고 내가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내기에 응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거짓말이 탄로 나는 게 겁나는 게 아니고?”
“정우재 씨.”
귀찮아 죽겠다는 듯한 목소리와 표정. 이쯤 되니 송태은이 그 여자인지 아닌지와 상관없이 무조건 이기고 싶어졌다.
“대신 내가 틀렸다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음.”
“……대체 무슨 수로 나라고 확신하는 거죠?”
우재는 그녀와 눈을 맞춘 채 어깨를 으쓱였다. 이곳으로 오면서 얼핏 본 태은의 손엔 분명 투명 밴드가 붙어 있었다. 하필 같은 때 같은 자리에 난 상처. 그걸 과연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채 사라지지 않았을 왼손의 상처와 송태은의 양심을 믿어 보지.”
그리고 송태은이 어쭙잖은 거짓말을 할 성격이 못 된다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나는…….”
“아! 미리 말해 두자면 이틀 전 실시간 방송 시청자 중의 하나가 나였거든.”
미세하게 흔들리는 태은의 눈동자가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대하는 태도는 매번 쌀쌀맞기 그지없는데 눈동자는 부드럽게 따듯한 느낌이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던가. 어쩌면 태은은 보기보다 여린 걸지도 모른다.
우재의 시선이 좀 더 아래로 내려가 굳게 다물린 입술에 닿았다. 살짝 웃기만 해도 훨씬 더 예쁠 텐데 웃는 법을 모르나? 우재는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리며 태은을 응시했다.
오기 아닌 오기를 부려 가며 어떻게든 만날 핑계를 만들어 보려는 건 분명 저 여자에게 끌리는 구석이 있어서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그 끌림이 싫지 않았다.
“아니면 아니라고 해 봐.”
“아니라고 하면 믿어 줄 거예요?”
“아니.”
“아까는 믿는다면서요.”
“양심적이지 못한 송태은을 믿는 척하면서 어떻게든 다른 증거를 더 찾아내겠지. 내가 보기보다 집요한 구석이 있어서.”
들릴락 말락 한 작은 한숨 소리. 진실과 거짓말 사이에서 고민에 빠진 태은의 눈빛이 한참을 그에게 머물렀다.
그러다 마침내 체념한 듯 작은 밴드가 붙은 왼손을 들어 보였다.
“눈썰미가 무서울 정도네요.”
태은의 중얼거림에 희열이 솟구쳤다.
“별말씀을.”
이걸로 내가 이긴 건가.
승리감에 도취한 우재가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그러자 그의 눈가에 자잘한 주름 몇 개가 만들어졌다.
“이제 일정을 잡을 일만 남은 건가?”
적당한 날을 떠올리는 우재의 귓가에 귀찮아 죽겠다는 듯한 태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근데 다음 주 수요일은 바빠요.”
“아무 때나 상관없어. 오밤중이라도 불러내면 밥 먹으러 달려올 테니까.”
우재는 식은 찌개를 떠서 남은 밥을 마저 먹기 시작했다. 밥이 이상하게 달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