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소개
“사과도 참 빨리 하는군. 남을 엿보는 게 그렇게 재밌었어?”
희윤은 번쩍 눈을 떴다. 이 남자의 빈정대는 말투는 이제 못 참겠다!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어요.
전 단지 교수님과 은경 씨가 왜 으슥한 곳으로 가는지 궁금했을 뿐이에요.”
“남녀가 으슥한 곳으로 가든 말든 무슨 상관이지? 관음증이라도 있나?”
“아뇨! 솔직하게 말씀드릴까요.
교수님이 불륜이라도 저지르는 게 아닌가 감시하러 갔었어요!”
혁찬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희윤이 난생처음 보는 눈빛을 지었다.
희윤은 주춤 물러나고 싶었다. 무슨 사람 눈이 저렇게 차단 말인가.
“그 말, 물에 빠져 죽은 내 부인이 들었다면 정말 기뻐했겠군.”
“네?”
혁찬이 손을 뻗어 희윤의 팔목을 우악스레 움켜쥐었다.
그의 손은 죽었다 살아난 사람처럼 차갑기 그지없었다.
희윤은 문득 그가 왜 저녁에 보았던 차림 그대로인지 알 것 같았다.
은경 조교와 헤어졌던 자리에서 지금까지 쭉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한밤중이 다 돼 가는 시간임에도!
그러나 중요한 건 그 사실이 아니었다.
혁찬은 잡아 죽일 듯이 희윤을 바라보고 있었고 희윤은 겁에 질려 있었다.
하지만 희윤의 마음은 점차, 점차 풀어졌다.
대체 뭐가 그리 괴로워서 지금까지 홀로, 바닷가를 떠나지 않고 있었는지.
무슨 고민이 있어서, 무엇이 그리 슬퍼서,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 했는지.
희윤의 가슴이 저려 왔다.
이럴 상황이 아닌데도 울컥울컥 눈물이 삐져나왔다.
그녀의 눈물을 본 혁찬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비겁하게 눈물인가? 여자들은 눈물이면 다 해결된다고 생각하나 보군.”
“아, 그런 거 아니에요.”
“이제 또 되도 않는 변명을 하시겠다?”
“두 분을 훔쳐본 건 정말 죄송해요. 단순한 호기심이었어요. 그리고 사모님 일도, 전혀 몰랐고요.”
그제야 혁찬이 손을 풀었다.
그의 질리게 차갑던 손이 닿은 곳이 여전히 서늘했다.
하지만 희윤은 손목을 문지르거나 재빨리 물러나지 않았다.
희윤은 그 자리에서 그저 물끄러미 혁찬을 바라보았다.
혁찬의 눈동자가 알 수 없는 기운으로 흔들렸다.
그는 굉장히 혼란스러운 기색이었다.
희윤에게 화가 난 건 분명한데 더 이상 화를 낼 수 없었다. 빈정댈 수도 없었다.
희윤에게는 그의 혼란이 빤히 보였다.
희윤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 그대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희윤의 동작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매섭고 날카로웠으나
조금 전까지의 빙하 같던 한기는 한결 가셔 있었다.
희윤은 여느 때의 희윤이라면 감히 상상도 못할 행동을 그에게 했다.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따뜻한 손으로 덮어 주었다.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의 눈동자는 경악으로 크게 뜨여졌다.
희윤은 그런 그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 그의 눈동자가 희윤을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차츰차츰 내려앉았다. 그리고 아프게 허물어졌다.
일순간이었다.
그의 눈이 질끈 감겼다.
희윤은 손을 뻗어 그의 등을 끌어안으려 했다."